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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2013년 3월 15일(금)@후쿠오카공항 국제선 터미널
장 소:에다 에이지 씨(후쿠오카공항빌딩주식회사 지역・홍보과)
딜즈 씨, 카즈미 씨(후쿠오카공항빌딩주식회사 사업부 업무과)

 

사람이나 화물이 오고 가는 관문에 있는 공항.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매일 어떻게 느끼고 계시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후쿠오카 공항빌딩주식회사에 계신 두 분을 뵙고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2개월에 한 번 간격으로 한국과 후쿠오카를 오가는 영두 씨는 후쿠오카 공항은 「마치 자신의 앞마당과 같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계속되어 >

후쿠오카공항 국제선 출국자는 하루 약 400명.
매년 증가 추세로 앞으로도 늘어날 전망.

 

영두> 이곳에서 5년간 일하고 계시는데요. 이용객의 증감 등과 관련해서 공항의 변화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어요.

딜즈> 국제선은 세계적인 큰 사건이 생기면 예를 들면 사스나 인플루엔자, 리먼쇼크도 마찬가지로 뭔가 사건이 발생하면 이용객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거나 줄어들어요. 그런 일이 대체로 일 년에 한 번은 있어요. 최근의 예는 작년 동일본대지진 같은 건데요. 정말 일시적이지만, 이용객 수가 줄어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 이후 순조로운 회복세를 보였는데 작년 상황에 영향을 받아 중국발 이용객 수가 약간 줄어든 상황이고요.

 

영두> 외국에 나가는 일본 이용객의 증가와 감소는 어떻게 변했나요?

딜즈> 최근 몇 년 중에도 올해는 승객 수가 늘어났어요. LCC(저가항공) 노선이 후쿠오카에서 계속 증가 추세라서 이용객 전체는 상당히 늘어난 상황이에요. 한국 쪽 노선도 증가했고요.

 

에다> 작년에 출국한 일본인은 약 92만 명이에요. 즉 왕복으로 따지면 180만 명이 국제선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56만 명의 외국인이 일본에 입국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영두> 그렇다면 하루 이용객은 얼마 정도 되나요?

에다> 하루에는 평균 약 4,000명이 출국하고 4,000명 정도가 입국하고 있네요.

 

영두> 굉장한 수네요. 공항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인데요. 예를 들면 한국인 이용객과 어떤 말썽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요? 그리고 나라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는 종류나 다를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경험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딜즈> 한국인 이용객은 최근 몇 년간 젊은 층이 상당히 늘어났어요. 젊은 세대와 가족 여행객, 학생들이 LCC 등을 이용해서 일본에 오고 있어요. 브랜드 제품은 한국에서 사는 것 같고 공항에서는 과자 등을 사는 경우가 많고요. 특별한 트러블은 없었던 거 같아요. 반대로 제가 한국에 가서 느낀 점은 중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느낌이었어요. 중국인 여행객들은 단체로 움직일 때가 많아서 그 활기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일본인과는 또 다른 힘을 느낄 수 있었어요. (웃음)

 

주택지와 가까운 공항.
지리적인 장점은 있지만, 이용시간 제한이나 소음 문제도.


영두> 후쿠오카공항은 시내에서 가깝고 편리하지만 장단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딜즈> 먼저 후쿠오카의 장점은 너무 큰 대도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대부분 것들이 다 있고 도시가 조밀하니까 쇼핑하기도 좋고 바다나 산, 온천과도 가까워서 후쿠오카에 사는 사람 입장으로서도 편리하죠.

 

영두> 반대로 너무 가까워서 불편함을 느낀다든지 주민이 공항 측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하지는 않나요?

 

에다> 시내와 근접한 공항이기 때문에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만 공항을 사용할 수 있어요. 원래 공항은 24시간 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소음 문제로 후쿠오카공항은 이용 시간에 제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주택가 상공을 비행기가 지나지 않도록 북측, 즉 바다 쪽에서 비행기가 진입하도록 노선이 정해져 있고요. 그런데도 소음 문제는 나오고 있고요. 풍향에 따라서는 회항해서 산 쪽에서 공항으로 진입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역시 소음이 가장 큰 문제가 되죠.

 

영두> 후쿠오카공항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에다> 공항이 생긴 건 쇼와 20년(1945년) 이에요. 원래는 일본군이 전쟁을 위한 목적으로 만든 공항이었지만, 패전 후 미군이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1972년에 민간 공항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미군 시설이 공항 내에 남아있어요. 이 자리에 국제선이 들어선 게 평성 11년(1999년)이니까 14년 전이네요. 이전에는 국내선 바로 옆에 국제선이 있었어요.

 

영두> 후쿠오카에서 처음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가 취항한 건 언제인가요? 또 외국에서 처음 후쿠오카로 취항한 건 어느 나라 비행기였나요?

 

에다> 쇼와 40년(1965년)에 후쿠오카와 부산 간에 처음 정기편이 생겼어요.

영두> 와, 부산인가요? 그 이유는 가깝기 때문인가요?

딜즈> 아무래도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있고 일본에는 재일코리안 분들이 많이 계시니까 그게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면세점에도 재일코리안 분들이 많이 일하고 계세요. 유학생도 있고요. 한국 분들은 아주 가까이에 많이 계세요.

 

영두> 작년부터 후쿠오카와 한국을 오가고 있는데 정말 가까우니까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도 꼭 후쿠오카 공연을 보러 와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 많은 분이 후쿠오카를 방문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여러 번 오신 분도 계시고요.

 

딜즈> 쇼핑도 특별한 물건보다 가족 단위로 방문하셔서 일상용품처럼 평소에 많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사 가시는 것 같아요. 드럭스토어 같은 곳에 많이들 가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리고 맛있는 음식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신 것 같고요.

후쿠오카를 방문하는 외국인의 과반수는 한국인.
후쿠오카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영두> 많은 분이 공항을 이용하는 걸로 생각됩니다. 특별한 시즌이나 나라별로 어필하는 부분이 다를 것 같은데 후쿠오카 공항은 어떤 전략으로 접근하고 있는지요?

 

딜즈> 먼저 면세점 내에서도 나라별로 관심도가 달라요. 예를 들면 한국 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건 과자예요. 그중에서도 「히요코」가 가장 인기 있어요. 나라마다 인기 있는 과자도 다 다르고요. 그래서 후쿠오카공항에서만 살 수 있는 「히요코」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요. 그리고 인터넷으로 한국 여행사를 통해 후쿠오카공항 쿠폰을 배부하고 있어요. 그건 중국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어요. 특히 한국 분들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자주 이용하시니까 앞으로도 그쪽 부분에서 좀 더 홍보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두> 이용객이 많은 나라는 어디인가요?

에다> 상위 3위까지라면 한국 분들이 가장 많아요. 외국인의 과반수는 한국 분들이에요. 다음은 대만이에요. 17% 정도고요. 중국이 15%네요. 한국 분들이 단연 가장 많으세요. 이용객이 늘고 있는 나라는 태국이에요. 좀 더 정확하게는 일본 출국자가 많고 일본에 오시는 분들 수가 적다고 할 수 있죠.

 

영두> 그럼 후쿠오카에서 가장 많이 출국하는 나라는 어디인가요?


딜즈> 그것도 한국이에요. 요즘은 당일 일정으로 가시는 분들도 많아졌어요.

영두> 한국에서 인기 있는 과자는 「히요코」라고 하셨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떤 게 가장 인기 있나요?

 

딜즈> 중국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시로이 코이비토」라는 홋카이도 과자예요. 후쿠오카 과자는 아니지만, 공항에서 살 수 있어요. 동남아시아 분들은 이것도 홋카이도 과자인데 「로이즈」라는 초콜릿을 좋아하세요. 특히 태국이나 싱가포르 분들에게 인기가 있어요.

영두> 재미있네요. 왜 인기가 있는 거죠?

 

딜즈>「히요코」는 후쿠오카 과자라서 많이들 좋아해 주시니까 저희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공항에서 한국 분들이 어떤 걸 가장 많이 사는지는 잘 모르지만 “후쿠오카에 왔으니까 이런 걸 사야지”라고 생각하는 손님보다 “일본에 왔으니까 일본 과자를 사야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대만 분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도쿄 바나나」예요. 원래는 「도쿄 바나나」는 동경에서만 판매하는 거라 후쿠오카 시내 어디에서도 못 사지만, 공항면세점에서는 구매 가능한 상품이거든요.


활주로가 하나뿐인 공항으로서는 출발, 도착 편수가 일본 제일.
국내선과 국제선을 합쳐 연간 약 1,700만 명 이용.

 

영두> 후쿠오카공항 국제선을 이용하는 외국발 비행기 편수는 어느 정도인가요?

 

에다> 일주일에 200편 정도가 도착하고 있어요. 하루 27~28편 정도고요.

 

영두> 국내선의 경우 다른 도시에서 후쿠오카로 오는 비행기 수는 어느 정도인가요?

 

에다> 하루에 180편 정도 돼요. 180편이 도착하고 180편이 출발하고 있어요. 가장 많을 때는 3분에 한 번꼴로 도착하고 출발할 때도 있습니다.

 

영두> 그 정도면 일본 국내 공항으로는 많은 편인가요?

에다> 활주로가 하나뿐인 곳으로는 일본 으뜸이죠. 다만 하네다나 다른 곳도 활주로가 여러 개인 곳을 다 합쳐 국내선이라면 5위가 됩니다. 국제선도 그 정도예요.

 

영두> 생각보다 훨씬 많네요!

 

에다> 올해 더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에요. 국제선 이용객 수가 재작년에는 250만 명이었는데 작년에 300만 명이 되었거든요. 국내선도 늘어나는 추세로 1,700만 명 정도의 이용객 수에 달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내, 국제선을 합쳐 일본 내에서 3위나 4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두> 후쿠오카에 뭔가 특별한 게 있어서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에다> 국내에 계신 분들은 관광보다는 비즈니스 관계로 많이들 오시는 것 같아요. 후쿠오카를 통해 규슈 각지로 가시는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후쿠오카로 오는 비행기 편이 많으니까 편리하겠죠. 좀 더 지방으로 갈수록 편수가 거의 없는 일도 있어요.

 

영두> 그렇군요. 조금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만약 후쿠오카 공항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1대 “최후의 비행기 편”만 남았을 경우, 어떤 걸 가져가시겠어요? 반대로 외국에서 돌아올 때 “최후의 비행기 편”에 타게 된다면 어느 나라에서 어떤 걸 가져오고 싶으세요?

 

에다> 글쎄요…일본에서 가져가는 건 저 같으면 후쿠오카라면 「아마오우」라는 딸기가 있는데 정말 맛있어서 모두에게 맛보이고 싶으니 그걸 가져가고 싶네요. 그런 맛있는 음식을 가져가고 싶어요. 외국에서 가져오는 건 저 같으면 「한국 김」을 가져오고 싶네요. 정말 좋아하는 거라서요.(웃음)

 

딜즈> 어렵네요.(웃음) 정신적인 것과 관련된 거라면,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국민성은 일본이나 한국에도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정신성이 일본은 매우 높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물건이라면 쌀이네요. 특히 구미 쪽에 가게 되면 맛있는 쌀이 없어서. 가져오는 건…어느 나라나 비슷할 것 같은데요. 시대별로 교육 방식이 변화됐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글로벌적인 것이 요구되는 시대니까 일본의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글로벌 스텐더드 같은 걸 가져오고 싶네요.

공항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가 교류하는 후쿠오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소.

 

영두> 공항에서 일하시니까 많은 외국 분들을 만나실 거라 생각되는데. 예를 들면 뉴스 등에서 일본이나 외국에서 일어나는 시위 장면 등을 보셨을 때 어떤 기분이 드세요?

 

에다> 빨리 해결되었으면 하죠. 그런 문제는 서로 대화를 통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해서는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사실이 아닌지 하는 것은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래 왔지만, 미래를 생각하면서 대화를 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딜즈> 저도 많은 사람과 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몇 번을 만나더라도 오해는 생기기 마련하겠지만, 자주 만나는 사이에 국경을 넘어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영두> 공항이라는 곳은 외부에서 뭔가가 들어오고 뭔가가 외부로 나가는 곳이잖아요. 그런 장소이기에 오히려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에다> 공항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여러 나라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즐겁게 생각합니다. 도착한 분을 마중 나갈 때가 있는데요. 마음이 통할 때는 저도 즐겁고 상대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죠. 또 고국으로 돌아가시는 분, 일본에서 나가시는 분들을 보고 있으면 저희도 기쁜 마음이 들죠. 그런 마음의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공항은 후쿠오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소라고 생각해요.

딜즈> 저도 그런 부분에 동감합니다. 곤란하거나 나쁜 점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국제교류라는 의미에서는 장점이 많아요. 후쿠오카에 오시는 외국 분들에게 처음 접하는 일본, 마지막에 보는 일본이 후쿠오카인 이상 저희도 좋은 인상을 느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아마 공항에서 근무하는 어느 직원이나 그런 마음일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공항뿐만 아니라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가게나 관광지에 계시는 분들도 외국인들을 접할 기회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국제 정세나 나라 간의 문제들은 때때로 여러 가지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런 벽은 없는 게 아닌가 싶고요. 그래서 작은 교류부터 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영두> 공항에서 근무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일을 하셨을 것 같으세요? 또 매일 특별히 열심 노력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으신지요.

 

딜즈> 저는 원래부터 사람을 대하는 일이 하고 싶었어요. 외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일이 아니면 뭘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제가 몸담은 회사에는 여러 부서가 있는데요. 전에는 시스템 부서에서 일했어요. 그런 부서는 사람을 상대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런 부서조차도 여러 사람이 있고요. 예를 들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사람과 만나는 이상 그걸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어요. 가끔 제멋대로인 손님들도 계시지만,(웃음) 그걸 큰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어요.

 

에다> 저는 이 일이 아니더라도 후쿠오카에서 일했을 것 같아요. 후쿠오카를 정말 좋아하고 여기서 계속 살고 싶으니까 후쿠오카에 본사가 있는 회사나 후쿠오카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영두> 후쿠오카가 왜 좋으세요?

 

에다> 축제도 즐겁고 음식도 맛있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굉장히 여유가 있고 인정미가 있어요. 아이들도 이런 환경에서 키우고 싶고요. 그런 점들 때문에 역시 후쿠오카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최선을 다하는 일은 후쿠오카는 스포츠에 굉장히 열성적인 도시인데요. 저는 소년 럭비팀 코치를 하고 있어요. 18명의 학생이 있는데 잘하는 아이도 있고 조금 실력이 부족한 아이도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럭비를 좋아하게 만드는 데는 너무 혼만 내도 안 되고 칭찬도 해 가면서 지도를 해야 하고 안 되던 것들이 가능하게 바뀌어 가는 게 즐거움이에요. 좀처럼 저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지만, 그런 코치 일은 제 기쁨이에요.

영두> 그거 멋진 일이네요. 오늘 바쁘신 와중에도 긴 시간 말씀 나눠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 시:2013년 3월 15일 (금)@후쿠오카 중앙우체국
장 소:고야사코 준이치 씨(제1영업부 부장)/ 요시무라 유미코 씨(창구업무 담당)

 

보내는 이의 마음을 싣고 바다를 건너 거리를 지나 누군가에게 보내지는 편지나 우편물들. 인터넷이 보급된 오늘날에도 우편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후쿠오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우체국을 방문하고 싶다! 는 영두 씨의 바람으로 후쿠오카 중앙우체국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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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보급이 있었기에 새삼 편지의 좋은 점을 느낄 수 있다.

 

영두>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이전보다 우편물이 줄어들지 않았냐는 생각이 드는데요. 인터넷의 발달 이전과 이후에 우편물 양은 어느 정도 달라졌나요?

요시무라> 확실히 인터넷이 빠르고 편리하니까 우편물 수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죠. 일상의 간단한 연락은 인터넷이나 화상 전화를 이용해서 하겠지만, 예를 들어 외국에 손자를 둔 할머니가 오셔서 손자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손으로 직접 쓴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손수 쓴 카드에 일본 분위기가 느껴지는 우표를 붙인 우편물을 건네받게 되는데요. 그런 마음이 담긴 편지는 받는 사람에게도 기쁜 일이니까 양적으로 줄어들었지는 모르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만큼 편지의 좋은 점도 새삼 다시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두> 한국에는 병역제가 있는데 그때는 친구나 가족과 만날 수 없어서 편지를 주고받아요. 그럴 때 편지는 역시나 기쁨을 주는 존재이죠. 우체국이나 편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후쿠오카에서 외국에 보내는 우편물 양과 외국에서 후쿠오카로 보내지는 우편물 양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요?

 

고야사코> 압도적으로 도착하는 쪽이 많아요. 특히 외국에서 보내진 우편은 비니스 관련이 많습니다. 후쿠오카에서는 EMS도 포함해서 중국이나 한국으로 보내지는 우편물이 많고요. 그래서 우리도 그쪽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어요.

 

영두> 예를 들어 후쿠오카에 사는 한국이나 중국 분들이 모국으로 화물을 보낼 때 어떤 것들을 많이 보내세요?

 

요시무라> 의류나 일상잡화가 많아요. 그다음은 후쿠오카 과자 등의 식품이 많고요.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나 편지를 전할 때 그런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느낀다.

 

영두> 저희가 어릴 적 한국에서는 편지를 부칠 때 편지 봉투에 배달원 분께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같은 말들을 쓰곤 했어요. 우체국에서 일하시면서 우체국의 존재 의미는 어떤 순간에 느끼세요?

요시무라> 저는 창구 근무를 하니까 손님이 가져오신 우편물을 접수하는 게 제 일이죠. 창구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건 예를 들면 한국에 사는 가족에게 후쿠오카의 과자를 맛보게 하고 싶다거나 하는 건데요. 실제 제 일은 우편물을 접수하는 게 다지만 그런 마음이 담긴 선물을 할 때 제가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기뻐요. 요즘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한국어나 중국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우체국에서 근무한 지 10년 되었는데 처음 일할 때보다 그런 필요성을 매일 느끼고 있어요. 손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다른 나라 분들의 생활 방식이나 이야기를 들게 되면 공부도 되고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런 부분도 포함해서 일하는 보람이 있는 직장이에요. 작은 일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으니까요. 손님과의 대화는 매우 즐거운 일이죠.

 

영두> 그와 반대로 일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예를 들면 외국 분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힘들었다든가. 외국 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체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방문을 했으면 좋겠다든가.

요시무라> 언어는 분명 어려운 문제죠. 저는 한국어나 중국어를 몰라서 오신 분 중에 일본어를 모르시는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영어도 서로 모국어가 아니라서 좀처럼 소통이 안 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가능한 노력 해보고 아무리 해도 힘들 때는 사내에 중국어나 한국어를 하실 수 있는 직원에게 도움을 받기도 해요. 모르시는 점이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물어보셨으면 해요. 저희도 힘닿는 데까지 서비스를 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의문이 생기면 직접 물어보시면 좋겠어요.

영두> 외국에서 오는 우편물 양은 어느 정도인가요?

코야사코> 외국에서 온 화물이나 우편물은 국내에 도착하는 시점부터 배달되기까지 국내 우편물과 같이 취급해요. 그래서 사실은 자세히 알 수가 없어요.

영두> 그럼 외국에 보내는 양은 어느 정도인가요?

코야사코> 후쿠오카 중앙우체국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편지나 서류는 하루에 15~16통 정도 됩니다. EMS 등의 화물이 30건 정도고요. 다만 그건 창구에서 직접 접수하는 수이고 그것과는 별도로 우체통에 넣어지는 양도 있어요. 우체통에 넣어지는 양이 더 많을 거예요.

 

영두> 생각보다 적네요. 우체국 일자리도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코야사코> 인터넷 보급 등도 있고 분명 우편물 양은 줄어들고 있고 작업 자체의 양도 다소 줄어든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시대나 상황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두>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면 일도 늘어나겠네요!

코야사코> 그렇죠.(웃음)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이나 편지를 전할 때 그런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느낀다.

 

영두> 앞으로 편지를 더 많이 보내겠습니다.(웃음) 우체국은 예전부터 있던 거라서 상상하기 어렵지만, 만약 우체국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고 또 전해 받을 수 있을까요.

요시무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우체국이 너무 당연한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항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라 만약 없어진다면 불편해지겠죠. 명절 선물이나 연말에 일본인 고유의 선물 보내기에도 곤란이 생길 테고 자필 편지 같은 걸 못 보내게 되면 멀리 있는 가족과 서신 연락도 어렵게 되고 외로워질 것 같은데요.

 

영두> 메일보다도 손수 쓴 편지를 받는 편이 훨씬 기쁠 거라 생각해요. 우체국이 없다면 누군가가 보낸 걸 받을 수 없을 테고 내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도 못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와 상대를 이어주던 실이 끊어지는 것처럼 외로워질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요시무라> 딱 요즘 같은 봄 시즌은 학교 입학이나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시기이죠. 그런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편지를 넣은 선물을 보낸다거나 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느끼는 때죠. 그래서 그런 게 없어지는 사람들은 외로워질 거란 생각이 드네요. 편지는 그 사람만의 맛이 있잖아요. 개성이랄까. 그리고 그 지방의 사투리 등도 들어가 있고요.

고야사코>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우편 사업이 시작된 지 150년이 지났는데, 전국 방방곡곡에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벌률상 의무기도 해요. 인프라 적인 면에서도 우체국은 없어지면 안 된다는 게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요. 그렇기 위해선 힘을 다해 우체국 이용을 늘리고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경영적인 부분에서 대책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요.

 

영두> 우체국을 자주 이용하는데요. 우체국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사람과 나라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자주 생각해요. 우체국은 그런 사람과 사람, 사람과 나라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우편물을 늘리려고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일반 사람이 모르는 “우리는 이런 부분까지 힘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다”고 이용객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코야사코> 이용을 하시는 데 있어 손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서비스를 얼마나 양질로 제공할 수 있는지가 가장 기본이 된다고 생각해요. 약속한 날짜 내에 빠르고 확실하게 우편물을 배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그것에 전력을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편의 이용 편리성을 먼저 이해한 다음, 편지의 좋은 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시무라> 저는 창구에서 손님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업무를 하고 있으니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끈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창구를 찾아주신 분들께 좋은 느낌을 주게 되면 또 우체국을 방문해 주시니까요. 그건 “확실하게 배달된다”는 신뢰가 바탕이 되고 난 뒤의 플러스 알파 같은 부분이지만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소통 가능한 창구 만들기를 하고 싶다고 할까요. 단순히 우체국은 편지를 맡기는 곳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사람으로서도 사랑받을 수 있도록 그런 유대도 소중히 하고 싶어요.

 

 

 


 

 

일 시:2013년 3월 11일 (월)@이탈리아회관・후쿠오카
장 소:도리아노 스리스 씨

후쿠오카 추오쿠에 있는 이탈리아회관・후쿠오카를 방문해서 관장인 도리아노 씨와 말씀을 나눴습니다.


1974년에 일본에 와서 39년째인 도리아노 씨. 「일본인이 아니기에 오히려 알 수 있었던 것, 보였던 것, 느꼈던 것에 관해 듣고 싶다!」던 영두 씨의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오랜 경험이 녹아든 여러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고 영두 씨 자신도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전체적 이미지가 조금 뚜렷해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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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생활할 때 다름이 플러스가 되기에 오히려 즐겁다.

영두>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부터 후쿠오카와 한국을 오가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느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후쿠오카나 일본은 어떤 곳인가?」라는 고민으로 일본인이 아닌 분에게 그런 점에 대해 여쭤보고 싶었어요.
저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을 벗어나지 않으면 제 나라가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한국을 떠나 외부에서 한국을 봤을 때 여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잘 볼 수 있었던 경험이 있어요. 예를 들면 한국에 살고 계신 외국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잘 볼 수 없었던 것을 배우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도리아노 씨께 오랜 시간 일본에 사시면서 느꼈던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도리아노 씨는 일본에 오신 지 38년이 되신 걸로 아는데요. 이탈리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주 많이 계실 것으로 생각되는데 때때로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는 없으신가요?

 

도리아노> 요즘도 이탈리아와 일본을 오가고 있으니까 별로 그런 느낌은 없어요. 한번은 4년 정도 못 갔던 적도 있는데 그때는 친구나 가족을 보고 싶긴 했지만, 고국이 그립다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나라보다는 친구나 가족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요즘은 스카이프도 있고 옛날만큼 멀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인지 그렇게까지 그립다는 생각이 안 들기도 해요.

영두> 도리아노 씨는 ‘치쿠젠비와’라는 악기를 만나고 나서 인생이 바뀌셨다고 들었는데, 그 만남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건가요?

 

도리아노> 일본에 와서부터 예요. 당시는 일본에 오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안 했다기보다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생활도 힘들었고 산다고 해도 1년 정도로 생각했으니까.

 

영두> 일본에는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되었나요?

도리아노> 이탈리아에서 일본 여성과 만나 결혼하고 2년간 함께 살다가 일본에 왔어요. 마침 일도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어요.

 

영두>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도리아노> 저는 이탈리아에서 인형극을 했어요. 르네상스 시대 등 고가구 복원 일을 하는 친구 가게에서 가끔 아르바이트로 일을 돕기도 했는데, 그 친구는 제 인형극을 좋아해서 인형극에 사용하는 인형의 손 부분을 가게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그걸 마음에 들어 한 일본인 여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게 첫 만남이었죠.

영두> 결혼하실 당시에 외국인과의 결혼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도리아노> 제 가족들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어요.

영두>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결혼하면 힘든 일이 아주 많은데요.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생활하는 건 더 힘든 일이 많지 않을까 싶은데 서로 다른 문화 때문에 생긴 오해나 해프닝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도리아노>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각자 모두가 다를 것 같은데요. 물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도 다른 점이 많았지만, 문화가 다르다는 점이 오히려 큰 플러스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매일 서로의 다른 점을 발견하거나 알게 되니까 신선했어요. 많이들 결혼하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겨워진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었어요.

 

이색적이었던 일본의 이미지가 한 일본 여성과의 만남으로 한순간에 변했다.

 

영두> 문화가 다른 점을 즐기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탈리아에 계셨을 때나 사모님과 만나시기 전에 일본이나 아시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반대로 사모님도 이탈리아에 가시기 전에 이탈리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서로의 만남이나 결혼 후에 그런 것이 어떻게 변했나요? 일본에 계시면서 바뀐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도리아노> 당시 유럽, 특히 이탈리아 미디어에 소개되는 일본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일본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죠. 당시에는 일본인이 아침 조회시간에 회사의 사가를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뭐라고 할까요. 군사적이랄까 그런 이미지가 강했어요. 그리고 동경 지하철 출퇴근 시간의 북새통을 보면서 그런 일본의 전형적인 이미지만 소개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인은 모두 일만 죽으라 하는 것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그녀를 만나고 나서 그런 걸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반대로 흥미가 생겼죠. 그리고는 일본에 와서 더 좋아지게 되었죠.

 

영두> 앞으로 일본에 오고 싶어하거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일본에서의 생활에 대한 특별한 조언 같은 게 있으신지요?

 

도리아노> 어려운데요.(웃음) 서양인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웃음) 그런 부분을 좀 누르고 일본의 문화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양인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자기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 내기보다 받아들이려는 의식이 더 필요해요.
또 하나, 자국 안에 있을 때는 자기 나라를 제대로 잘 못 보게 되죠. 그건 가족이나 지인, 일과 같은 환경들이 그 나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외국에 갔을 때 모든 것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되는데. 자국의 모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외국에 대해서는 외부의 시선에서 보고 말아요. 그런 것들 탓에 균형 잡히지 않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왜 다른가를 본인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선입견을 없애고 순수하게 바라본다면, 모순까지도 포함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반대로 다른 나라에 있을 때 자신이 그곳에 있을 때보다 더 명확히 자국을 볼 수 있겠죠.

 

영두> 이번에는 반대로 일본이나 후쿠오카에 온 외국인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요?

 

도리아노> 그것도 어려운데요.(웃음) 일본에는 “가이진(外人)”이란 말이 있죠. 가이진은 일본인 이외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도 미국에 있는 미국사람도 “가이진”이 되죠. 하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이탈리아에 와 있는 외국인을 “가이진”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 있는 일본인이나 미국에 있는 미국인을 가이진이라 부르진 않아요. 그래서 일본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튀어나오는 “가이진”이라는 말의 의미가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일본인 이외의 전 세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니까요. 그건 의아하게 느껴지는 점이에요.(웃음) 하지만 잘 들어보면 일본인이 “가이진”이라는 말을 쓸 때는 대게가 서양인 이미지예요. 예를 들면 중국 사람은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가이진 중에서도 카테고리가 구분되어 있다고 할까, 단계별로 나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외국인에 대해서 동등한 입장으로 대해주셨으면 합니다.(웃음)

 

영두> 다른 질문을 할게요. 일본 음식 좋아하세요?

 

도리아노> 좋아하는 건 많은데요. 처음부터 싫었던 건 낫토예요. 끈적거리는 걸 싫어해서요. 요즘은 이탈리아에도 일본 요리점이 많이 생겼는데 예전에는 별로 없어서 음식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본에 와서 반년 정도는 아주 힘들었어요.

영두> 특별히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도리아노> 제일 좋아하는 건 초밥이에요. 하지만 아무 초밥이나 좋아하는 건 아니고 정해진 단골집 초밥을 좋아해요.(웃음) 맛없는 초밥을 먹는 정도라면 야키소바를 먹는 게 나아요.(웃음)

 

단순히 이탈리아 문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훌륭하게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고자.

 

영두> 인형극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언어가 가진 힘이나 중요함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 현재 이탈리아보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더 오래되셨죠? 언어에 대한 불편함은 이제 없으실 것 같은데요. 일본에 왔을 당시, 본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힘들었던 적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도리아노> 막 일본에 왔을 때는 「사요나라」라는 말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었죠. 일본에 와서 반년 정도 지나 치쿠젠비와(筑前琵琶)를 만나게 되었고, 치쿠젠비와 장인의 제자가 된 후에 매일 그 선생님의 일본어라기보다 하카타방언을 매일 들으면서 조금씩 말을 익혀갔는데요. 혼자서 한자 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일본어 학교는 다닌 적이 없고요. 사실은 원래 제가 해왔던 연극이나 인형극을 하고 싶었는데 무리라는 생각을 했어요. 말을 구사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말을 배우기까지 어려웠는데 요즘 겨우 일본인과 함께 연극 번역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번역은 두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양측의 모국어가 함께 하지 않으면 진짜 의미를 번역해내기 어려워요.

 

영두> 어떤 계기로 이런 센터(이탈리아회관)를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상호 양국 문화를 전하는 센터를 운영하시면서 가장 기뻤든 일과 가장 힘들었든 경험은 어떤 건가요?

 

도리아노> 저는 1974년에 일본에 왔어요. 당시 이탈리아 하면 일본 사람 대부분이 “스파게티”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미켈란젤로도 아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아닌(웃음).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굉장했어요. 그런 스파게티조차도 이탈리아의 원래 것과는 전혀 다른 거였고요. 나폴리탄 같은 거 말이죠. (웃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외국에 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자국이 더 잘 보이게 되죠. 좋은 점 나쁜 점 할 것 없이 자기 나라에 있을 때는 자국 문화에 대해 관성화되지만, 밖에 나와보면 더 잘 보여요.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이탈리아의 문화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장점들도 알게 되면서 이탈리아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게다가 이탈리아어도 가르치고 싶어서 이탈리아어 교실도 시작했어요.
시작 당시에는 이탈리아 문화센터라는 이름이었어요. 목적은 이탈리아 문화를 소개하고 이탈리아어 교실을 하는 거였죠. 일본인이 잘 모르는 제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문화를 소개하려고 생각했어요. 뭐든 다 좋을 수는 없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탈리아 영화를 소개했어요. 예전에는 일본에 이탈리아 영화가 들어왔지만, 점점 수도 줄어들게 되었죠. 1984년에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탈리아영화제를 개최했어요. 거기에 7,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와 주었는데 정말 기뻤어요. 이 센터는 이탈리아 대사관 등과 관계없이 100% 개인 자본으로 운영되는 센터고요.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면서 생기는 수익으로 여러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어요. 주변에서 이 센터는 절대로 오래 운영되지 못 할거라고들 했지만요.(웃음) 그런 와중에도 이벤트나 교실에서 이익을 내면서 이탈리아의 음악가를 불러 콘서트를 열거나 이탈리아 미술전 등을 개최하는 것으로 조금씩 이탈리아의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있어요.

 

영두> 도리아노 씨는 이탈리아 어느 지역 출신이세요?

도리아노>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 사르데냐라는 작은 섬이고요. 어릴 때부터 로마에서 자랐어요.

 

영두> 이탈리아에 계실 때는 인형극을 전문으로 하셨나요?

 

도리아노> 원래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어요. 7년의 학교 과정이었는데 5년 차에 인형극을 하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극단에 있던 친구가 병에 걸려서 대신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도우러 갔던 게 시작이었어요. 그때 제 인생이 바뀌었죠.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도와주러 갔는데 처음 인형을 조작했는데도 칭찬을 받았죠.(웃음) 이후 음악을 그만두고 그 극단에 들어갔어요. 인형극이라고 해도 어린이극은 아니고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거였어요.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나 (사무엘) 베케트 등의 작품을 인형극으로 보여주는 거였어요. 그곳에서 2년 정도 머물다가 이후에 제 인형극단을 만들었어요. 인형극 극단을요. 그리고는 유럽을 순회하면서 공연했어요.

 

영두> 요즘에는 다시 인형극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도리아노> 그럴 생각 없어요.(웃음)

 

영두> 그건 인형극에 대한 흥미가 없어져서인가요? 아니면 오랫동안 안 하셔서 그만두시게 된 건가요?

 

도리아노> 어느 쪽도 아니에요. 우리가 했던 인형극은 정치적인 모티브로 사회를 풍자하는 게 많았어요. 그런 건 자국에서는 공감

받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무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일본에서 그런 걸 못 하는 상황도 있고요. 가장 첫째 이유는 흥미가 없어진 거죠.

 

영두> 현재 국적은 어떻게 되세요?

 

도리아노> 이탈리아예요. 영주권을 취득했을 뿐이에요.

 

영두> 예를 들어 국적을 바꾸고 싶었던 적은 없으셨나요?

도리아노> 예전에는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는 비와를 만들고 있었는데 후계자가 저 하나만 남게 되어서 그런 점들 때문에 받을 수 있었죠. 전에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보다 오래 일본에 살 거면 귀화해서 일본 국적을 받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영두> 현재 치쿠젠비와 제작에 관한 것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치기도 하세요?

 

도리아노> 비와를 만들거나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가르치고 있진 않아요. 요즘은 새 비와를 만드는 것보다도 옛것을 복원하는 일이 더 좋아요. 복원은 옛것을 그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되니까 대충의 눈속임은 통하지 않죠. 옛날에는 장인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정말 훌륭한 미술품 같은 악기가 많아요. 예를 들면 비와의 현을 조절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 부분 하나하나가 훌륭한 미술품이에요. 그런 부분이 망가졌을 때는 예전의 상태와 똑같이 되돌리는 건 힘드니까 그 부분을 빼내고 다른 것을 사용해서 새로 만들어 넣어요. 그건 “수리”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가 하는 “복원”이라는 것은 그 부분을 몇 달이 걸리더라도 원상태 그대로 돌려놓는 일이죠. 요즘은 그 제작방법도 모르는 악기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원상태로 돌려놓는 건데요. 너무 재미있어서 그 작업에 폭 빠져있어요.

 

국적은 상관없다. 인간 상호 간의 만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상대의 눈을 보고 대화를 하는 것.

 

영두> 제가 일본을 오간 지 10년 정도 되는데, 항상 어떻게 하면 선입관을 없애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나라 관계없이 사람과 사람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 사람,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인정을 한 후에 만나는 편이 사람 간의 원만한 만남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 되는 건 아닐까’하고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점을 타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해 오신 도리아노 씨께 여쭙고 싶은데요. 사람이 서로에 대한 정보 없이 또, 다른 언어를 가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원만히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도리아노> 제가 일본에 막 왔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어느 곳을 가든지 사람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배경 뒤에는 어떻든지 간에 문화나 생활이 자리 잡고 있죠. 교육, 콤플렉스, 싫었던 경험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이해한 다음 서로 알아가는 게 중요해요. 일본에서 배운 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편이 원만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거예요. 특히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만날 때는 호기심을 가지지 않으면 만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많은 사람과의 만남보다 긴밀한 소통이 가능한 사람과 둘이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껴요. 둘이라면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대화를 통해 충분히 서로의 이해 폭을 넓힐 수 있죠.

 

영두> 조금 이상한 질문일 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일본이나 이탈리아에 있는 것 중에 가령, 지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왔을 때 어떤 걸 가져가고 싶으세요? 일본과 이탈리아 하나씩 말씀해 주세요.

 

도리아노> 그건 일본, 이탈리아 할 것 없이 똑같아요 “여성”입니다.(웃음)

 

영두> 이번에는 반대로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꼭 없애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도리아노> 이탈리아라면 아주 많아요. (웃음) 단, 하나만 꼽는다면…, 이탈리아는 “대충대충”이 아닐까 싶네요. 조금은 책임감이 부족한 부분도 있으니까요. 일본은 그 반대예요. 융통성이 없는 부분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일인데요. 이탈리아는 야간에도 버스 운행을 하거든요. 그때 탄 버스에 12~3명 정도의 승객이 타고 있었는데 거기에 타고 있던 60대분이 많이 취해있었어요. 기사분이 걱정되어 그 취한 승객에게 “살고 계신 곳이 어디세요?” 하고 물으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굉장히 먼 곳에 집이 있었어요. 그래서 기사분이 “집까지 모셔다 드릴까요?”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타고 있던 승객 모두가 그 말에 손뼉을 치고 버스는 그대로 그 사람 집 앞까지 가게 되었어요. 저도 취해서 몸을 못 가누던 사람을 부축해서 문까지 데려다 줬고 그 사람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건 굉장히 기분 좋은 사건이었어요. 물론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기뻐했죠. 그래서 이탈리아인의 대충대충은 때로는 멋진 일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이건 일본에서는 아마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네요.

 

영두> 현재 연극이나 무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부분을 짜 맞춰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작품 전체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오늘 들려주신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던 전체적인 이미지가 조금은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 것 같아요. 귀중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리아노> 조금 전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도 영두 씨의 눈을 보면서 매우 흥미를 느꼈어요.

 

영두> 다음에 또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리고 공연 전에 이곳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 시:2012년 7월 30일 (월)
장 소:후쿠오카 시청/ 오쿠다 마시히로 씨 (후쿠오카시 주택설계과장)


「도시는 대체 누구 만드는 걸까?」는 관점에서 행정의 입장에 서 있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쿠다 씨는 10년간 후쿠오카시 도시만들기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2 후쿠오카 도시계획」이라는 자료를 토대로 후쿠오카시의 특징과 도시계획이 어떻게 계획되고 진행되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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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시는 어떤 곳인가?
이 도시에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오쿠다> 지리적으로 후쿠오카와 부산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요. 당연히 예로부터 왕래가 있었고 후쿠오카는 도심부를 포함한 대부분이 매립지로 예전에는 「소데노미나토」라는 항이 있었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하카타 상인들이 한국이나 중국과 무역을 해온 도시이죠.

그 후 다이코 마치와리라고 불렸는데 다이코 히데요시가 후쿠오카 마을 구획정비를 했어요. 교토처럼 마을 입구가 좁고 마을 안쪽은 넓게 구획을 나눴는데, 하카타 지역의 원형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을의 틀이 만들어지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후쿠오카의 치쿠젠 일국을 하사받고 거주했던 성을 후쿠오카죠라 명명했어요. 그런 후쿠오카죠를 중심으로 마을 한가운데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 강을 사이에 두고 교토와 닮은 지역은 하카타라는 상인의 고장, 성에 가까운 곳은 후쿠오카라는 무사의 고장으로 두 지역이 갈라졌죠.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 도시가 만들어질 무렵에 후쿠오카 시로 할지 하카타 시로 할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투표를 해서 결과적으로 「후쿠오카시」가 생기게 된 거죠. 그때부터 조금씩 주변 지역과 합쳐지면서 커지게 되었어요. 어느 정도 후쿠오카시가 정비되던 시점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때 주변의 도심부가 전화로 불타게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지금 지역의 대부분을 전쟁부흥 구획정비사업이라는 명목하에 도로를 만들고 주택을 새로 짓는 사업을 진행해 왔고요.

그것과 동시에 바다 쪽도 조금씩 매립해서 항만 정비를 하는 식으로 현재의 후쿠오카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로부터 점점 지역이 커지기 시작해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어요.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지만, 전쟁이 나고 돌아가고 싶어도 못 간 사람도 아주 많았기 때문에 후쿠오카는 조선, 한국분 할 것 없이 많은 도시가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 왕래도 잦고 함께 생활하는 지역이 되고 있어요.
후쿠오카 도시만들기의 특징으로는 후쿠오카공항이라는 하늘의 관문이 도심부 가까이 있다는 점인데요. 바다의 관문은 하카타・중앙부두이고 육로의 관문은 신칸센이 달리는 하카타역, 그런 세 개의 교통 관문이 근접하고 있어서 사람 왕래가 원활한 좋은 도시가 되었죠. 세계적으로 이렇게 교통기관이 근접해 있는 곳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른바 도심부와 이와 연계된 부도심이 Y자형 구조로 되어 있어요. 도심, 부도심에 맞춰 새로운 거점으로 동과 서에 각각 아일랜트시티와 규슈대학이 있습니다. 규슈대학은 일본에 7개밖에 없는 옛 제국대학으로 한국이나 중국 유학생이 매우 많은 학교이죠.

후쿠오카는 적당히 도시이면서 산과 바다, 농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좋은 곳이죠. 일본 전체는 저출산 고령화로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후쿠오카는 2035년까지 인구가 계속 늘어날 전망이에요. 현재 인구가 148만 명 정도인데 가장 절정일 때는 160만을 넘길 것으로 예측되고 있고요. 인구가 늘어나도 풍부한 자연은 가능하면 훼손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지역 내의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도심 내부적인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현 다카시마 시장은 관광을 모토로 외국에서 후쿠오카로 사람을 불러들여 후쿠오카를 규슈 관광의 발착기지로 삼고자 항만 부근 시설 정비 등에도 힘을 쏟고 있어요.
후쿠오카에는 큰 강이 없어 물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공장 유치는 어렵기 때문에 관광을 제3차 산업으로 해서 지역부흥을 꾀하고자 하는 원대한 발상을 하고 있어요.

영두> 전혀 몰랐던 것을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민은 이 지역에서 일하고 수입을 얻어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가고, 그런 일터 환경이나 생활 기반은 시 공무원들이 만들고 계신 거군요. 행복한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오카시를 관광화시키는 사업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일을 진행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 같습니다만,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은 어떤 건가요?

재단직원> 문화 부분에서는 조직변경이 이루어져 올해부터 집객문화관광국으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문화진흥만 담당해왔던 부서까지 통합되면서「관광」이라는 단일 부서가 되었어요. 전략에도 변화가 있는데 지금까지의 시민문화진흥이라는 목표에 더해 관광객 유치라는 경제효과까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어요. 이 지역에는 여러 문화단체가 있고 본래 문화 진흥이라는 것과 집객은 별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온갖 노력을 다해 순수하게 해 왔던 일들이 조금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게 다른 문화단체들이 걱정하는 부분입니다.

 

영두> 도시 구축을 목표로 할 때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무엇입니까?

 

오쿠다> 구축이라는 부분에서 말하면 일본 도시 계획에서는 가장 먼저 도로를 정합니다. 도로가 결정되면 그에 따른 교통량 등을 고려해서 건물을 짓죠. 그걸 사람 몸에 비유하면 뼈가 도로이고 근육이 건물이 되죠. 그래서 근육을 키워도 뼈가 약하면 금방 문제가 생기게 되니까 그런 균형을 잘 맞춰가면서 일을 진행하죠. 따라서 처음에 도로를 만들고 건물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을 도시계획의 용적률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중에서 상업지역은 토지 면적의 4배~8배까지 건물의 건축허가를 내주는 지역을 말합니다.

일본 전체를 사람 몸에 비유하면 동경은 두뇌, 후쿠오카는 오른쪽 눈.

 

영두> 오쿠다 씨는 시청에서 근무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오쿠다> 시청에 근무한 지 18년이 됩니다. 후쿠오카에 오기 전에 동경에 있었는데 공무원은 아니었고요.

 

영두> 오쿠다 씨가 보신 후쿠오카와 동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오쿠다> 동경은 후쿠오카의 도심부가 계속 이어진 것 같은 이미지예요. 후쿠오카 도심부는 텐진이나 하카타역 주변밖에 없어서 거기에 사람이나 시설물이 전부 모여있어요. 상업시설이나 오락시설의 집약 정도에서 말하자면 동경보다 후쿠오카가 살기 편한 곳이죠.

영두> 조금 전에 말씀하신 뼈대와 근육에 대한 것인데 일본을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후쿠오카는 어디에 해당합니까?

오쿠다> 신체 부위로 치자면 동경은 두뇌가 되겠죠. 거기에 이어진 게 오사카와 나고야예요.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도시를 포함한 지역을 삼대도시권이라고 부르고 있고요. 그다음에 항상 언급되는 게 후쿠오카 도시권입니다. 결국, 네 번째로 중요한 부위가 어딘가라는 이야기인데요. 그다음에 필요한 게 소통 가능성일 것 같네요. 그렇게 따지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입에서 말을 뱉어 소통한다’는 것이 다음 단계일 텐데 후쿠오카는 오른쪽 눈 정도 되겠네요. 아마 왼쪽 눈은 삿포로일 겁니다. (웃음)

 

영두> 도시가 발전한다. 인간의 생활이 발전한다. 이 둘의 관계성에 많은 관심이 있는데요. 서울이나 부산에 높은 고층빌딩이 들어서거나 멋들어진 도로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생활이 풍요로워진다는 장담은 못하겠죠. 이렇듯 자신이 사는 환경의 외형이 계속 만들어지더라도 거기에 맞춰 인간도 더 행복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또한 「도시 발전=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뉴욕에 사는 사람이나 런던에 사는 사람처럼 도시인이 행복해지는 게 당연할 텐데 지금도 자연 속에 사는 원시 주민이 도시 사람과 비교해서 행복수치는 더 높다는 겁니다. 도시가 계획대로 발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주기 위한 대안을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도시 발전은 건물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까지 고려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점에 있어서 후쿠오카 거주민을 위해 공원이나 상업시설을 만드실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외에 다른 계획들이 있으신지요?

 

오쿠다> 말씀하신 것처럼 도시가 좋은지 나쁜지는 여러 가치관에 따라 당연히 달라지겠죠. 이런 도시계획이란 뭘 계획하는 것인가 하면, 도시는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니까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렵겠죠. 우선은 그런 살기 불편한 점을 없애자는 게 도시계획의 첫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규칙을 정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분류 과정에서 골격이 되는 도로나 지어도 되는 건축물 등 불필요한 것을 나누는 기준을 만들게 되죠.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시설이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맡느냐에 따라 정해진 뼈대 위에 거기에 알맞은 것들을 고민하고 채워가는 게 행정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시설을 만들 때, 사람이 모이는 역 주변에 꼭 필요한 시설물이라면 그걸 짓는 일은 각 분야의 몫이 되겠죠. 그래서 영두 씨의 의견도 이해되고 그런 일을 자유롭게 고민하고 의견교환을 하면서 시민에게 보다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또한 저희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오카시는 「관광」이란 견지에서 아시아의 발착지점을 목표로 한다.

 

영두> 저는 예술가라서 하고 싶은 일들을 그대로 할 수 있지만, 시청에 계시는 분들은 시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요.

재단직원> 민간에서 문화시설을 만들 때는 우대제도가 확실히 있습니다. 우리 문화 쪽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도시계획 쪽에서도 그런 걸 고려해서 일을 진행하고 있어요. 조금 전에 행복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도시란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그중에서도 문화적 요소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그런 점을 도시만들기라는 부분에 확실히 반영시키고 있고 관련 정책들 역시도 확실하게 포함되어 있어요.

 

영두>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시 공무원으로서의 가치관이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으세요? 자신의 가치관과 시의 기준 사이의 격차는 없나요?

 

오쿠다> 당연히 있지만, 시청 직원이고 공무원인 이상 개인의 생각은 가능하면 누르려고 해요. 물론 개인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는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공의 입장으로 개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영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오쿠다>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뭘 하든 간에 돈이 드니까 재정적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서부터가 시작이죠.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문화시설 만들기나 도시를 꽃피우기 위한 여러 사업에서도 확보 가능한 세납에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세납을 늘리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말 투자를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거죠. 하고 싶은 일은 정말 많지만, 재단으로 들어오는 재정 중에 무엇을 최우선으로 할 것인지는 당시의 사회정세에 맞는 과제인식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영두> 정말 전혀 몰랐던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어디 가서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후쿠오카에 빈자리가 있으면 절 불러주세요. (웃음)

사토> 지도상으로도 후쿠오카와 부산은 매우 가까운데요. 아시아 속의 후쿠오카라는 의식은 가지고 계시는지요?

 

오쿠다> 후쿠오카시 전체로 보면 현재, 25년 만에 종합계획 책정을 시작했는데 거기에도 역시 아시아를 향해 열린 중심도시로서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자 하는 내용이 핵심이에요. 오사카보다 부산과 더 가깝고 동경과 같은 거리라면 상해까지 갈 수 있죠. 그런 아시아 각 도시와 긴밀한 왕래가 있기 때문에 저희도 당연히 앞으로의 관광객 유치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시아 전역에서 크루즈선을 이용해 관광객을 불러들여,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규슈 각지나 교토 등지에 갈 수 있는 관광 발착지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 세대와 여러 사람을 우선 후쿠오카에 오게 하고, 많은 사람과의 교류가 가능한 도시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후쿠오카의 주요 산업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관광객 유치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일 시:2012년 7월 30일 (월)
장 소: 후쿠오카 시내 통신판매회사 사무소/ 나오무라 신이치 (통신판매회사 대표이사)


「물건이나 사람이 나라 사이를 오가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던 영두 씨. 한국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신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분은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일본에 건너왔다고 합니다. 그 시절의 경험담도 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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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재일 코리안.
그 성공의 비결과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생각들.

 

나오무라> 한국에서 태어나 8살에 전후 일본에 왔습니다. 소학교 3학년 때니까 50년이 지났네요. 저는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왔어요. 지금은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는데 제 일은 한국 상품을 유통판매 하는 거라서 다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는 지금 91세입니다. 아버지는 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사진이 한 장도 안 남아 있네요. 아버지 대신이라 생각하고 일본에서 온 힘을 다 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30년이 되네요.

영두> 30년간 유통판매를 하셨는데 특히 어떤 상품이 많나요? 

 

나오무라> 일상 생활용품 중에서 청소용품을 주로 취급해요. 이건 경기와 관계없이 팔리는 물건이거든요. 일본 버블기에는 보석이나 시계가 유통판매의 중심이었지만, 저는 경기를 타지 않는 상품 (늘 팔리는 물건)을 주로 하고 싶었어요. 보석은 보는 눈이 없고 저도 흥미가 없어서 폭발적으로 팔리는 상품은 취급해 본 적은 없어요.

 

영두> 자신이 들여온 상품이 많은 일본 가정에 보급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순한 상품이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할 거고 그 집의 가풍을 바꾸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나오무라> 리먼 쇼크가 있었을 때 일본에도 바로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해서 같은 상품에 두 단계의 가격 설정을 했어요. 두 가지 제안서를 냈는데 리먼 쇼크의 영향으로 저렴한 가격에 팔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삼 분의 일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야 했습니다. 회사 내부나 방송국 사람들도 걱정했는데 낮은 가격으로 성공할 수 있었지요. 리먼 쇼크가 덕분에 오히려 상품 취급 방법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영두> 신상품을 박람회에서 발견하고 상품을 구매했는데 실제로는 다른 상품이 왔던 적은 없었나요?

 

나오무라> 그런 일은 다반사죠. (웃음)

 

영두> 그런 중국의 문화적 특징, 한국의 문화적 특징, 일본의 문화적 특징들을 사장님이 잘 알고 계시니까 각 나라에 알맞은 상품을 판매하실 수 있는 게 아닌가요?

 

나오무라> 일본을 대상으로 판매할 때, 최근에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경우 제조 관리와 만들어진 상품의 검품 관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일본과 중국은 차이가 크게 나니까 확실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일본에서는 못 판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일본에서의 좁은 취업 문. 그게 오히려 제가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어요.

 

영두>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느낄 때가 있습니까?

 

나오무라> 일본에서는 장인들의 사제 관계가 제대로 남아있어서 그것을 계승해가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어요. 그건 매우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한국은 그런 사제 관계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재일에게는 취업 문이 너무 좁습니다. 그래서 이 일도 시작한 거지만 우리 회사는 그런 차별 없이 중국인, 한국인도 함께 일하고 있고요. 그런 국적 구분은 인터넷이 발달한 덕분에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8살 때 일본에 와서 소학교 시절에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어머니 옆에 꼭 붙어 있었어요. 학교 친구에게 맞은 적이 있는데 바닷가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중학생이 되어서는 몸집도 커져서 저를 때린 친구를 맞받아 친 적도 있을 정도로 반항심이 강했어요. 언제부턴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나오는 사건의 범인 이름이 재일인 것을 보고는 일본에 사는 재일의 입장으로는 진지한 삶을 살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 이유는 저를 키워준 건 일본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한국에 꼭 1, 2개월에 한 번 성묘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머니 쪽의 성묘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사는 재일들은 거의 비슷한 상황이지만 손 마사요시 씨처럼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도 있으니까 제 목표는 그런 성공한 사람을 거울삼아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어요.

 

영두> 전후, 한일 관계가 나빠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나오무라> 저는 지금 귀화해서 일본인이 되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나라들은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많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경제력도 따라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일의 역사라는 부분은 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표출할 필요는 없는 거죠.

 

정보를 얻는 방법은 책상 위에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이 체험해야만 한다.

 

영두> 저도 일본에 올 때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돌아갑니다. 한국이라면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서 바로 실행하는 원동력이 있는 나라인데, 일본은 타인을 대하는 습성과 계획성 있는 일 처리 등은 한국인으로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오무라>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웃어른이나 부모님을 공경하는 예의란 게 있었는데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요.

 

영두> 가족분들은 계신가요?

 

나오무라> 장남이 30살, 장녀가 27살입니다. 장남은 우리 회사 인터넷 관련 일을 하고 있어요. 장녀는 가수고요. 일본에 와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생기고 주변에 친구들이 생겼는데, 일본에서 성공한 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 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두> 제 아이디어인데요. 최근 유통하고 있는 상품은 만드는 쪽에서 생각하면, 만들어진 물건을 누가 어떻게 쓸까. 사는 쪽에서는 누가 만들까는 알기 어렵잖아요. 그걸 실제로 알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제조부터 소비자까지의 루트를 추적할 수 있게 되면 뭔가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걸 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무용을 하는 사람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그런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나오무라 씨> 일본에 오셔서 모든 상황을 “왜?”,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문화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보를 얻는 방법은 아주 많지만, 반드시 본인이 직접 체험해 보실 것을 권해드려요.





일 시: 2012년 7월 29일(일)
장 소: 시내의 한국요리점/ 후쿠오카 거주 아티스트

 

이날은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를 만나서 한국요리점에서 식사를 겸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분의 할머님은 사실 한국의 제주도 출신.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뿌리를 가진 젊은 세대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등 영두 씨도 힘을 얻은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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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단 하나”
지금 후쿠오카에서 가져가고 싶은 것, 당신에게 있어 유일한 가치관이란.

 

영두> 일본을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말씀해 주세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고 싶어요. 편안한 기분으로 들려주세요.

 

아티스트1> 저는 심장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이곳을 삶의 거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생활하니까, 혹시나 다른 곳에서 산다고 해도 여기가 활동의 거점이었을 것 같아서 심장이 아닐까 하고.

 

아티스트2> 소거법으로 생각하면 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코나 입 정도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제 경우는 비염으로 코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웃음) 입이 되겠네요. 입은 음식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후쿠오카에서 친구를 만날 때 무엇에 만족을 느낄까를 생각해 보면 눈으로 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입이 아닐까 싶어요.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통역> 저는 배꼽인 것 같아요. 제게 후쿠오카는 제2의 고향이거든요. 배꼽은 모두가 항상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신체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몸 한가운데 있고요. 배꼽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영두> 그럼 이번에는 지구 전체가 사람 몸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어느 부분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본인이라는 것을 마음속에서 배제하기는 힘들겠지만, 가능하면 그 부분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어디가 될까요?

 

아티스트1> 저는 지구 규모로 커진다면 생각이 좀 달라지네요. 할머니께서 제주도 분이셨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제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제 할머니의 고향이 한국이라는 것은 늘 의식하고 있어요. 저 스스로는 순수한 일본인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고 100% 일본인이 아니라는 점은 늘 의식하고 있어요. 지구를 몸에 비유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하다면 양손 각각에 일본과 한국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들어요.

 

떠날 때는 몰랐던 후쿠오카의 좋은 점을 다시 돌아와서 느끼게 되었다.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여기서 찾고 싶다.

 

영두> 그럼 다시 질문을 바꿔서 한국을 지구라는 신체 일부분에 비유한다면 어느 부분이라고 생각하세요? 너무 깊이 생각 안 하셔도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어떤 이미지인가요?

 

아티스트2> 저는 최근 2~3년 동안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한국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접하는 기회도 많아져서 제 몸에 없었던 부분이 다시 생긴 것 같아요. 그건 접하지 않았다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접하면서 생겨난 거로 생각해요.

 

아티스트1> 손이라고 할까요. 여러 가지에 흥미가 있고 알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손으로 꽉 움켜쥐고 싶다는 느낌인지도 모르겠어요.

 

영두> 어제 다른 분에게도 여쭤봤는데 “후쿠오카의 100가지 중에 99개가 싫고 딱 하나만 좋은 게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하니까 그건 <사랑>이라고 하시더군요.

 

아티스트 2>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일이나 생활도 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제 여자친구의 고향이라 생각하면 싫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 눈감아 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외에도 좋은 점들이 보이지만 4년 전에는 그것 하나만 있었던 것 같아요.

 

아티스트1> 저도 한때 후쿠오카가 싫어져서 떠난 적이 있었어요. 다시 돌아와서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되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곳을 거점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동경에서 작업하고 싶어서 후쿠오카를 떠났었는데 돌아와서는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제가 얼마큼 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온 힘을 다해보고 싶어요. 그건 제가 처한 환경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영두> 만약, 일본이나 후쿠오카를 위해 한국이나 중국을 포함한 대륙에서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면 뭘 가져오시겠어요? 물건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문화 등도 포함해서 어떤 걸 가져오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아티스트1> 대륙과 비교하면 일본인은 생명력이나 강인함 같은 게 부족하지 않나 생각돼요. 전부는 아니지만, 일본 아티스트이 부족한 부분은 자기주장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본의 좋은 점은 없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어렵네요. (웃음)

일본에서 수출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감각.
거기에는 예절이나 규칙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영두> 반대로 일본에서 중국이나 한국 등의 대륙에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뭔가요?

 

아티스트2> 예를 들면 음식점에 가면 그 가게는 손님을 맞을 때 여러 면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거든요. 물론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그런 부분에서 상대에게 맞추려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인은 그런 부분에 특히 세심한 것 같아요. 그런 감각이라고 할까요. 서양의 예절이랄까 형식적인 예의 같은 게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배려하는 마음이죠. 그런 건 매뉴얼이나 형식과 절차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영두> 일본에 외국에서 들여오면 안 되는 게 있다면 어떤 건지 알려주세요? 혹은 별로 갖고 싶지 않은 거라든가?

 

아티스트1> 들여오면 안 되는 건 핵무기라든가 전쟁을 할 때 필요한 무기가 아닐까요. 일본에는 없으니까요.

아티스트2> 저는 많은 것들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걸로 인해 일본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어요. 배제하는지 받아들이는지. 그걸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네요. 거부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조금 전에 뭘 가져오면 좋겠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뭐든 괜찮다고 생각해요. 들여와서 변화시키는 건 일본인이니까. 접해보고 느껴본 뒤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면 된다고 생각하고요. 저도 외국에서 뭔가 감동을 했다든지 맛있는 음식을 만나게 되면 주위 사람들이나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거든요. 그걸 일본풍으로 바꿔서 받아들이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일본에 들여와서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그게 더 인간적이란 생각도 들고요.

 

영두> 한국 사정에서 보자면 한국은 지금 점점 갖가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쫓고 있는데 물건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에도 반영되고 있어요. 현재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저는 그런 것들을 좀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한국은 예술 분야에서도 ‘빨리빨리’라는 느낌으로 급한 감이 있어서 차근차근 준비해서 쌓아가는 여유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의 여유랄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마음을 가져가고 싶어요. 그렇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조금 전에 말씀하신 일본의 마음 씀씀이나 배려에 대해서는 저도 올 때마다 좋은 점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좀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일 시: 2012년 7월 28일 (토)
장 소: 규슈대학 하코자키 캠퍼스/ 쯔다 미츠오 씨 (규슈대학대학원 예술공학부 기술전문직원)

 

후쿠오카의 예술계의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계신 쯔다 씨. 규슈대학 하코자키 캠퍼스의 역사적인 건물 소개가 곁들여진 인터뷰가 이뤄졌습니다.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3월 공연을 규슈대학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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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무대는 일본의 역사를 머금은 「규슈대학」
이때 그를 만남으로 덕분에 창조의 가능성이 보였다.

 

쯔다> 저는 원래 후쿠오카 출신이 아니고 간사이 효고현 아와지시마 출신입니다. 중고생 때는 재일 출신 사람들과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살았던 아와지시마는 아니지만, 신세를 지고 있던 친척 아저씨 댁은 한국 사람들 거주지와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반대편 강변에는 한국인들의 집락 촌이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것 말고도 중학교 때는 친구가 북한에 되돌아가거나 해서 「키노시타 군」이 아니라 「박 군」으로 이름이 바뀐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죠. 간사이였다는 것도 있고 그런 일들이 제 주변에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기억에 남는 건 친척 아저씨 댁에서 가까운 강 건너편이었어요. 그곳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돼지 냄새가 나는 동시에 2월이 되면 구정에 입을 치마나 아름다운 색의 의상이 바깥에 널려 있었는데 그게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영두> 비행기가 추락했던 곳이나 전망대 등 여러 곳을 안내해 주셨는데 왜 그곳에 데려가려고 생각하셨나요?

쯔다> 지금의 저는 조금 전 이야기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본 것이나 들은 것들이 우리 신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규슈대학도 아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규슈대학 건물 자체보다도 규슈대학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할까. 예를 들면 조금 전 팬텀기와 규슈대학에서 행해졌던 생체 해부에 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규슈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훨씬 오래전부터 서 있던 건물들은 그런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전부 지켜봐 왔기 때문에, 어쩌면 그 건물 안에 기억들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느낌이 들었고요.

 

영두> 제게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여러 경험이나 시각적 체험들이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한국은 전쟁도 있었고 한국 땅에는 오래된 건물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탓에 예전의 소중한 기억이나 귀중한 건물을 보존하는 것보다 새로운 경제 성장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처럼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이나 가슴에는 그런 옛 건물들도 있지만 실제로 그걸 보러 가서 확인하거나 손으로 만지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역사적 건물에 새겨진 좋은 기억, 나쁜 기억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오랜 시간 여기에 서 있었던 역사적인 소중한 건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쯔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후쿠오카라는 도시는 남겨야 할 것들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그런 일면이 있습니다. 교토의 오래된 마을과는 조금 달라서 그런 점이 후쿠오카의 싫은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쿠오카는 살기 좋은 곳, 그렇지만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다.

 

영두> 후쿠오카에는 몇 년 정도 계셨어요?

 

쯔다> 30년 정도 되었네요. 후쿠오카 교육대학에 들어간 뒤 동경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어요. 나고야나 간사이에도 가봤고 6년을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결국에는 후쿠오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영두> 지금 후쿠오카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쯔다 상이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 요즘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에 다른 점이 있나요?

 

쯔다> 요즘 학생들은 통찰력이 있고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바보는 아니죠. (웃음)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치관이나 자신들의 열정이라는 부분에서 우리 세대는 큰 격차가 있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 차이가 조금 줄어든 것 같습니다.

 

영두> 지금 학생들은 그런 격차가 적다라고 하셨는데 그건 뭔가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이야기인가요?

 

쯔다> 센스나 감성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곳에 있으면 어두운 곳의 빛이나 명도에 따라 그 빛을 잘 포착할 수 있습니다. 단지 어두운 곳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그래서 포착하는 범위가 넓은지 좁은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좁기는 하지만 매우 어두운 곳에서 조금 한가운데로 조금 밝은 곳에서 미세한 흔들림의 폭이 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의 폭은 작지만 움직임은 확실히 있는 거죠.

 

영두> 섬세하다는 건가요?

 

쯔다> 그렇죠. 우리 때보다 민감하고 끝을 정하고 있죠.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면 어느 쪽으로 움직이면 거기에 닿을 수 있을까를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이라기보다 처한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거죠. 자신의 위치에서 최고의 감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감각은 있어요. 하지만 그 외 가능성은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할까요.

 

영두> 후쿠오카의 모든 것을 다 좋지만 딱 하나 이건 ‘절대 용서가 안 돼’라는 것이 있습니까?

 

쯔다> 용서가 안 된다기보다 다른 곳보다는 훨씬 좋다는 생각입니다. 동경보다도 꽤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많이들 후쿠오카에는 물건이 별로 없다든가 정보가 별로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예를 들면, 동경에서 조형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 전문가가 많이 있어서 의뢰하면 바로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만, 후쿠오카에는 아직 그런 전문가가 적다는 생각은 합니다.

 

영두> 반대로 ‘이것 때문에 후쿠오카에 계속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없으십니까?

 

쯔다> 저는 야마카사네요(웃음) 하지만 가장 싫은 것도 야마카사 일지도 모르겠어요. 야마카사를 앞두고는 마음이 매우 무겁지만, 막상 참여하게 되면 역시 이게 없다면 후쿠오카에서 살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모든 게 그곳에서 시작해서 그곳에서 끝을 맺는 그런 작품을 보고 싶다.

영두> 쯔다 상의 자녀분은 커서 뭐가 되고 싶다고 하나요?

쯔다> 지금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해요. 돈은 못 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웃음)

 

영두> 따님의 꿈과 쯔다 상이 따님에게 바라는 꿈은 같나요?

 

쯔다> 아마 전혀 다를 거예요.

 

영두> 따님이 어떤 일을 했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쯔다> 저는 일이라고 할까요, 죽을 때까지 계속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정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확실히 가져주길 바라지만 본인이 직업으로 하는 일과 평생 업으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생활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영두> 저는 후쿠오카에 살지도 않고 후쿠오카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지만, 이곳 후쿠오카에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지금은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듭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은 있지만 저는 여기 살지도 않고 일본인도 아니라서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모색 중입니다. 물론, 제가 느낀 그대로 작품을 만들겠지만 쯔다 상은 딱 하나의 작품만 볼 수 있고, 그게 제 작품이라고 한다면요. 제가 어떤 작품을 만들어주길 바라세요?

쯔다> 그건 영두 씨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 자신 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이 가장 좋겠지요.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전부를 다 말할 수 있는 작품.

 

영두> 지금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품의 힌트를 얻고 있는데 역시 제 생각들을 후쿠오카와 연결한 작품을 만들고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으면 하는데요. 그런 저에게 후쿠오카 안에서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으세요?

쯔다> 몇 군데 있습니다. 오쿠로죠(大黒荘)라는 고쿠쇼마치에 있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입니다. 그밖에 기온 아파트라고 구시타신사 가까이에 있는 쇼와 초기의 작은 아파트라든가. 그리고 고쿠쇼마치 근처의 하카타마치케(博多町家)의 쇼도쿠지나 쇼텐지 같은, 후쿠오카에도 많은 사찰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은 한국과 통하지 않을까 싶네요.

 

영두> 이번에는 힘들겠지만, 다음 방문에는 꼭 안내 부탁드립니다.

 

쯔다> 꼭 가도록 하죠. 하카타 뒷골목 탐방 같은 것도 해 보고 싶으니까 꼭 같이 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그런 뒷골목이 상당히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요.

 

하카타 방언에 「오우만(おうまん)」=「Don't mind」
그런 하카타의 기질을 외국에, 그리고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영두>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전 세계에서 후쿠오카만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가정으로 이곳에서 전 세계를 향해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만 있다면 그건 무엇입니까? 반대로 후쿠오카만이 가난하고 매우 살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가져오시겠습니까?

 

쯔다> 하카타 방언에“ 오우만(おうまん)”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괜찮아, 상관없어” 「Don't mind」나 「Not so but it's so easy」라는 사고방식에 가까운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하카타 사람들에게 그런 기질이 있어요. 그렇게 “대충 이러면 되는 거 아니야?”“괜찮아 괜찮아”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외부에 가져가도 좋을 것이고 반대로 후쿠오카에 사는 젊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영두> 지금 후쿠오카에 다른 나라에서 뭔가를 가져오면 후쿠오카가 더 좋아질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가져오시겠어요?

 

쯔다> 컬쳐센터라고 할까, 문화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아닐까 싶네요. 또한, 아트센터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후쿠오카에는 예술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원래부터 있어요. 하카타 인형이나 하카타오리(博多織) 등 전통적인 장인 정신이 많이 있어요. 부산 같은 곳에서도 전통을 소중히 지켜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더 잘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영두> 반대로 후쿠오카에서 아시아에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쯔다> 역사랄까.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전해주는 게 좋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정치적으로나 그 외 여러 문제도 포함해서 오히려 가까운 역사를 잊는다거나 봉인해 버리는 게 아니라 사실로써 전해야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아무래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걸 전하지 않는 건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우리가 얘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서로가 그런 것들을 알아가기 위한 일련의 장치들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단지 좋은 곳이니까 와 달라든가 문화가 있으니까 와 달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 시: 2012년 7월 18일 (토)
장 소: 이토시마시 어항/ 우메모토 마사미 씨 (어부)

 

「한일 양국 사이에 펼쳐진 “바다”에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영두 씨의 요청으로 이토시마 어항에서 오랜 세월 어부로 일해 오신 우메모토 씨를 만났습니다. 우메모토 씨는 아버지, 손자까지 삼대에 걸쳐 어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야기를 들려주신 “답례”로 영두 씨가 춤을 선보이셨습니다. 파란 하늘, 갯벌 내음,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배경 삼아 춤을 추는 영두 씨의 모습에 지켜보던 강아지도 매우 좋아하며 대흥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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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을 잇는 바다, 그 바다에서 터전을 일구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
바다에 대한 생각, 어부로서의 생업에 대한 생각들.

영두> 어떻게 해서든지 어부들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사짓는 걸 자주 봐 왔고 직접 일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부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후쿠오카는 바다와 가까운 도시입니다. 그런 후쿠오카에서 어부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늘 이런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우메모토> 요즘은 어부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1954년 어부가 되었는데 그때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이 일에 뛰어들었지요.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수산 고등학교가 생겼는데 2기 생이 입학할 시점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의 권유로 어부가 되었습니다.

 

영두> 어떤 어종을 주로 잡으시나요?

 

우메모토)한 척에 5톤인 배로 일을 하는데, 이 배에 밧줄을 몇 번 감아 통에 붙이고 밧줄을 위로 조금 들어 올린 상태로 잠시 예항합니다. 그리고 밧줄을 감아 가며 그물을 바다 밑에서 끌어올립니다. 그물에는 도미, 벤자리가 주로 잡힙니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잡히지만 주로 작은 것에서 중간 정도의 도미와 벤자리를 전문적으로 잡고 있지요.

 

영두> 아버님과 할아버님도 모두 어부셨나요?

 

우메모토> 네, 할아버지 대부터 어부 일을 하셨죠.

 

영두> 어릴 적에 이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은 없으셨나요?

 

우메모토> 저는 어릴 적부터 뱃멀미가 심해서 사실은 어부가 되기 싫다고 부모님께 말했지요. 수산 고등학교에 친구 몇 명이 다니고 있었기에 그곳에 들어가서 다른 일을 해 볼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특별히 하고 싶었던 일은 없었지만 다른 곳에서 일해볼까 하는 생각은 해 봤지요.

 

영두> 현재 자녀분도 어부인가요?

 

우메모토> 아이들도 어부이고 손자들도 어부 일을 하고 있네요. 아들은 제가 가려고 했던 수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부가 되었습니다. 손자는 가라츠 국립기술해연학교(국립기술전문학교)를 졸업했고요. 그래서 제 할아버님 대부터 손자까지 대대로 어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이 한창 일하실 때는 낚시가 주류여서 요즘처럼 그물이 아닌 낚시로 생계를 꾸려가셨습니다. 예전에 그물로는 선주라고 부를 정도로 격식 있는 집의 사람이 도구를 전부 갖추고 사람을 사서 고기를 잡았죠. 그래서 그 외 사람은 낚시로 생계를 꾸렸어요. 때때로 고용이 되면 선주 밑에서 일을 하곤 했지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저도 중학교를 나와 1954년부터 일하고 있지만, 선주 밑에서 일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뱃멀미가 너무 심해서 한번은 그만두려고 이곳을 떠났다가 부모님의 만류로 돌아왔죠. 그 후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남의 밑이 아니라 제가 직접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어부 일을 계속하려면 누군가에게 고용되는 것보다 어느 정도 경험도 있어서 제가 직접 하려고 배도 샀습니다. 처음에는 큰 배는 못 사고 작은 배를 사서 그다음에 더 큰 배를 사는 식으로 늘려갔어요.
이후에는 여러 필요에 따라 배를 바꾸고 있어요. 자동차처럼 유행도 있고요. 그래 저래 하는 사이에 아들도 어업을 하겠다고 했고 아버님도 일을 그만두시게 되어 아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손자도 어부가 되어서 셋이서 같이 하고 있어요. 저도 이제 75살이 되니까 전부 아들에게 맡기고 슬슬 은퇴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부자 삼 대가 바다로 나간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업”으로

 

영두> 도시에서는 삼 대가 같은 일을 한다는 건 힘들 거라 생각되는데 이곳에서 삼 대가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계시는지요?

 

우메모토> 요즘은 어업이 힘들어졌지만, 이전까지는 고기도 많이 잡혔기 때문에 어떻게든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죠. 하지만 아들도 손자도 좋아서 하는 일이라 같이 하고 있지요. 그래서 아들 손자 삼 대가 함께 일하고 있어요. 본인이 좋아서 한다면 다른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거고요.

 

영두> 요즘 어부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 것 같은데요.

 

우메모토> 요즘은 여러 어협이 합병하고 있어요. 전에는 제가 어업조합을 하고 있었지만, 나라 정책으로 때문에 합병하는 거니까. 새로 어항을 만들려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요. 어항 공사는 아무래도 나라에서 해 주지 않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처음에는 근방의 2-3개 어협이 합병했어요. 그렇게 하면 후계자도 만들 수 있고 일하기도 쉬워져요. 개인이 어협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힘들 점도 있고 나중에 나라에서 보조금을 못 받는 거 아닌가하는 걱정으로 할 수 없이 합병하게 되었어요. 조직이 커지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 거죠.

 

영두> 그로 인해 수입도 줄어들었나요?

 

우메모토> 그렇죠. 아무래도 지금은 관광 쪽이 활성화되었고 일시적으로는 소비자가 어류 소비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판로도 조금 안 좋아지고 판매에 어려운 부분들도 생겨났죠. 마을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직판장을 많이 만들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생선을 취급하는 가게들의 판매대도 줄어들었죠. 그런 지역의 정세도 있어서 이전보다 유통 상황이 나빠졌어요. 양적으로는 어느 정도 확보되었지만, 가격도 저렴해졌고. 이건 어업뿐 아니라 농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소비자의 선택 폭이 넓어지는 건 좋지만, 예전만큼은 힘들어요.

 

영두> 조합 합병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요?

 

우메모토> 첫째 이유는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고향에 남는 젊은이들이 적어졌어요. 이건 농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후계자 문제도 그렇고 시설 문제도 작은 어항에서는 해결 못 하게 되니까 합병으로 어느 정도 그걸 해결할 가능성을 높여 보자는 거지요. 게다가 그런 편이 나라에서 보조금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영두> 합병 이후에 상황이 좋아졌나요?

 

우메모토> 이제 합병하고 약 4년 정도 되었으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졌다는 건 별로 없어요. 불편해진 점이 많죠.

 

영두>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는 합병이 도움된 부분도 있군요.

 

우메모토> 그렇다고 생각해요. 작은 규모의 마을은 합병으로 좋아진 곳이 많다고 생각해요.

 

영두> 바다에서 일하면 위험한 순간이 많을 것 같은데요?

 

우메모토> 요즘은 여러 기계가 있지만, 바다가 거칠어져 있을 때는 무리해서 가동하다 보면 위험하죠. 제한이 많은 곳이니까. 한때는 사고가 자주 나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런 사고가 별로 없지만요. 요즘은 대형 선박이 중국에서 들어오거나 하면 곤란할 때가 있죠. 항로와 겹쳐지는 곳에서 고기를 잡을 때도 있으니까 그런 여객선이 때로 고기 잡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나 중국에서 시장으로 들어오는 어류나 채소 등도 많아졌고요.

 

산에는 산만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확 트인 바다가 뭐니뭐니해도 좋다.

 

영두> 지금 육지와 바다를 볼 때 다른 감정을 느끼세요?

 

우메모토> 달라요. 여행 갈 때도 산보다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웃음) 바다가 보이는 곳이 아름다우니까요. 산에는 산만의 매력이 있지만 우리는 역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마음껏 그 기분이 느낄 수 있거든요.

 

영두> 지금은 이곳에 사시지만 다른 지역의 바다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우메모토> 여기가 제일 맞는 거 같아서 다른 데서 일해 볼 생각은 없어요. 이곳은 자연의 풍성한 혜택을 받고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 환경이 없으면 일을 계속할 수 없죠. 아무리 바다가 가깝다고 해도 공장지대가 있으면 힘들어요. 여기는 거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가 있으니까요.

 

영두>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미래가 어떠면 좋으실 것 같으세요 ?

 

우메모토>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어부가 되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고 공부를 한 뒤 어부가 되는 사람이 많으니까, 공부한 것을 잘 살려서 앞으로 어망의 형태든 밧줄에 있어서든 여러 연구를 해서 좋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경험에 의지해서 일해 왔지만 요즘 사람들은 공부도 하고 경험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이상으로 뭔가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일 시:2012년 7월 27일(금)
장 소:후쿠오카시 히카시쿠의 주택단지/ 재일 코리안 2세 여러분과 함께(7분)


맨션의 한 방안에 재일 코리안 2세 여러분이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서로가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영두 씨의 따뜻한 말씨와 모두의 밝은 표정으로 분위기는 금방 편해졌습니다. 후쿠오카 재일 코리안의 역사나 그분들의 생활상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의 긴장된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즐거움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영두 씨의 춤사위에 맞춰 모두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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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의 이름으로 후쿠오카에서 사는 사람들.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으며, 어떤 인생이었을까?

영두> 전라남도 영암 출신입니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시작했어요. 더 공부하려고 졸업 후에 서울로 가게 되었어요. 어떤 극단에 소속해 있으면서 연극을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 무용에 흥미를 느끼고 무용가가 되었고요. 일본과의 교류는 2004년부터 해 오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 후쿠오카와 관련해서 작품을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전혀 몰랐던 후쿠오카를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기획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기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후쿠오카에 와 보니까 관광 외에는 이 지역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몰랐던 것을 배우고자 재단의 소개로 일본에 살고 계신 재일 분들을 만나뵙고자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로 여러분을 만나뵙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여러분의 생활 기반은 처음부터 후쿠오카였나요?

 

A 씨> 저는 야마구치 출신이에요. 시모노세키죠. 후쿠오카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일본 내에서는 후쿠오카가 동포가 제일 많은 지역이죠.

 

B 씨> 저는 기타큐슈에서 와서 후쿠오카에 산 지 50년이 지났네요.

 

C 씨> 여기에서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사람은 저뿐이군요.

 

D 씨> 저는 고베에서 태어나 후쿠오카로 시집왔어요. 딸은 교토에 살고 있고요.

 

영두> 여러분은 일본에서 태어나셨나요? 아니면 한국에서 오셨나요?

 

전원>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D 씨> 종전 훨씬 전인 1920년경에 아버지가 돈 벌러 일본에 오시고 어머니가 뒤따라 오셨죠. 그리고 제가 태어났어요. 저는 이즈카의 탄광촌에서 태어났고 86살입니다. 그래서 재일 2세가 되죠. 재일 중에 제 나이에 2세라고 하면 이상하다고들 하는데 강제연행이 있기 훨씬 전에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동년배들은 거의 1세인데 저는 2세인 거죠.

 

E 씨> 부모님은 한국에서 태어나셨고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6살 때 종전이 되었어요. 그래서 조선에 돌아가기 위해 후쿠오카에 왔는데 강풍으로 배(어선)가 바다로 못 나가고 계속 묶여 있게 되었어요. 그 후로 계속 일본에서 살아요.

 

B 씨> 종전 후에 조선에 돌아가려고 기타큐슈, 야마구치 근방의 사람이나 일본 각지에서 후쿠오카로 모여들었죠. 처음에는 어선이 오갔지만 바람이 심해져서 무서워서 모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대로 여기 후쿠오카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영두>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자기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D 씨> 저는 한 번도 못 가 봤어요. 하지만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직 친척들이 한국에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어느 정도 왕래가 있지 않으면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가려면 언제라도 갈 수 있지만 그런 필요성을 못 느껴요.

 

영두> 여러분은 자주 모이세요?

 

전원> 한 달에 두 번은 모이죠.

 

영두> 서로의 일을 잘 알고 계시네요.

 

F 씨>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두 번은 모임을 하고 있어요.

 

B 씨> 저는 어릴 적에 자주 한국에 갔었어요. 부모님 고향에 때때로 따라갔어요. 한국에 가장 최근에 간 게 소학교 6학년 때네요. 형제 셋이서 한국에 있는 친척 집에 갔던 게 마지막이죠. 조선학교가 생기고 4학년까지는 거기에 다녔는데 일본 경찰 때문에 못 가게 되었어요. 그 무렵 일본에 있던 조선학교는 문을 닫았어요.

 

F 씨>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께서 계속 조선어를 쓰셨기 때문에 조선어가 생활이었죠.

한 달에 한 번은 모두 모여요. 요즘에는 한국 드라마 보는 게 낙이죠.

 

영두> 여러분은 후쿠오카에 50년 이상 살고 계시는데, 불편한 점이나 좋은 점을 들려주세요.

B 씨> 다른 지역은 태풍이 오면 큰일인데 후쿠오카는 그런 태풍의 피해가 없어서 살기 좋아요. 요즘에는 모두 모여서 한국드라마 보는 게 낙이에요.

D 씨> 부모님은 부산 근방 출신인데 표준어는 모르시고 부산 사투리만 말씀하셔서 그걸 듣고 자란 우리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 표준어로 이야기하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말을 들어도 도통 못 알아듣겠어요.


영두> 전후 조선은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어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나요?

 

전원> 북조선 국적입니다.

 

지금은 국적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 적대할 필요는 없으니까.

 

영두> 여러분은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후쿠오카에 모였는데, 당시에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나요?

 

D 씨> 종전 후 일본에 남아 있으면 언제 살해될지 모르니까 무서워서 모두 조선에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제 친척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전부 조선에 돌아갔는데 제 아버지는 아이도 있고 돌아가서도 생활을 해야 하니까, 기반을 마련한 후에 고향에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남았어요. 그러다가 나이도 들고 아이들도 자라서 돌아갈 필요가 없어진 거죠. 그래서 귀향하지 않으셨고, 아버지 유언이 자신이 죽으면 고향(조선)에 묻어달라고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뼈를 한국으로 가지고 가셨어요. 그리고 산소를 만들고 어머니가 가실 때마다 친척들에게 물건이나 돈을 드리곤 했어요. 그러다가 돈에 욕심이 나서는 아버지 산소를 돌보던 친척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어요. 어머니가 안 가시게 되니까 산소도 방치 상태가 되었죠. 그런 친척 간의 다툼은 많이 있었지만 결국은 돈이 문제였어요.

 

B 씨> 한두 번 정도 여행을 가기 위해 국적을 바꿀 필요는 없어요. 제 아이들도 다 조선 국적이에요. 한국에 가기 위해서 국적을 바꿀 필요도 없고 다들 한 달에 두 번은 만나니까요. 모두가 같은 국적을 가진 것도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써요. 노래를 부른다거나 체조를 한다거나 송년회나 신년회도 다들 함께 보내고 있어요. 지금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우리는 나뉘기 전의 조선 국적이었기 때문에 지금 두 개로 나뉘었다고 해서 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두> 여러분의 자녀분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D 씨> 큰 손자가 결혼했고 둘째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입니다. 동경에서 재일 코리안이 주재하는 가극단에서 무용수를 하고 있어요. 셋째는 조선학교 선생님입니다. 넷째 손자도 조선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어요.

 

C 씨> 아버지는 식민지 기에 돈을 벌기 위해 구루메에 있는 농가에 농부로 일하러 왔습니다. 거기 생활이 안정되니까 한국에 있던 할머니를 후쿠오카에 모셔와 같이 살았어요. 그때 제가 태어났어요.

 

영두>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이것은 꼭 기억해 둬라, 이것은 꼭 지키라는 당부 같은 게 있으셨나요?

 

D 씨> 그때는 먹고 사는 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런 건 없었어요. 부모님은 일본에서 번 돈은 곧바로 조선에 보냈고 사실 자기 가정에는 돈이 없었어요. 그걸로 논이나 산을 사거나 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래서 한국에도 많은 돈을 보냈는데 결국 종전 후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송금한 게 허사가 돼버렸어요. 서로 안 만나게 되었으니까.

 

일본에서 살았기에 더욱 조선의 관습을 엄격하게 배울 수 있었다.

 

영두> 여러분과 자녀분들은 같은 나라 사람과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세요?

 

D 씨> 우리 때는 연애란 거 자체가 없었어요.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사람과 얼굴 한번 못 보고 결혼하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C 씨> 입을 줄이기 위해 딸을 빨리 시집보내는 일도 있던 시절이었지요.

 

B 씨> 84살. 태어난 것도 자란 것도 공부도 일본에서 했어요. 한국어는 서른이 넘어 야간학교에서 배웠어요. 거기서 말과 글을 배웠죠. 부모님께서 한국어로 말을 하시니까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말을 못하니까 거기서 배웠죠. 다들 그런 식으로 한국어를 배웠어요.

 

D 씨> 그 시절은 일본어를 할 수 있지만, 집에서는 안 쓰는 게 집안 규칙이었죠. (집에서는 조선어로 이야기했어요.) 일터도 아주 엄격했어요. 돈을 벌 때는 양복도 두 벌밖에 없고 밥도 같이 먹으면 안 됐어요. 일본어 있었기에 더욱 조선의 옛 관습을 엄격하게 배울 수 있었죠. 남편은 그런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왜 같이 밥을 먹으면 안 되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일본이나 조선이나 그런 시절도 있었으니까.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는 1970년대는 북조선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은 있었지만, 일본 내의 조선인들이 자신의 자산을 투자하거나 자금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됐어요. 도심에 학교를 세우기도 어려워서 시골에 있는 산을 개간하는 것도 우리 손으로 했어요. 사업에서 성공해서 그 자금을 쏟아 부은 사람도 있었지요.

 

B 씨> 이즈카 조선학교는 탄광촌이라 조선인이 많았어요. 탄광 문화가 없어지고 학생도 줄어들고 조선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라서 2, 3세들은 조선에 대해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자국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어요.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낼 돈도 없고 학생도 줄어서 3년 전에는 이즈카 조선학교는 없어졌어요.

 

생활 기반은 일본, 하지만 결혼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재일 간의 생활에 너무 익숙한 게 큰 이유입니다.

 

영두> 여러분 자녀는 일본인과 결혼했나요? 재일과 결혼했나요?

 

전원> 재일과 결혼했어요.

 

영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D 씨> 재일 간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일본인과의 생활은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그 어느 쪽도 아닌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서로가 재일이 아닐 때 감각의 차이가 있거든요.

 

A 씨> 그건 옛날 일이고 요즘에는 전부 연애잖아요.

영두> 여러분 자녀 중에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나요?

 

A 씨> 제 아들 둘 다 일본인과 결혼했어요. 아이들은 일본에서 일하니까 일본인과의 만남이 대부분이라 당연한 거죠.

 

C 씨> 같은 동포라 하더라도 조선학교에 다닌 사람, 일본 학교에 다닌 사람이 있으니까 각자가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에요. 국제결혼 한 사람도 있지만, 법이란 벽에 부딪히게 되죠. 태어난 아이는 일본인이 돼요. 재일을 없애기 위해 일본이 그렇게 법을 만들었죠.
(※현재는 한국 측에 출생신고를 하면 일본과의 이중 국적을 취득할 수 있음.)

 

D 씨> 친하게 지내는 건 친척보다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에요. 일본인들과 잘 지내는 경우도 많고요. 일본인이 나쁘다는 이미지도 있는데 실제로 사귀면 그런 일은 전혀 없어요. 그건 미디어나 정치 이야기고 민간 레벨에서 그런 일은 없어요. 이웃 간에 인사나 교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먼 친척보다 가까운 곳의 타인.
사는 데 있어 특별히 다른 건 없다. 단지 국적이 다를 뿐.

 

영두> 여러분의 생활과 일본인의 생활에서 다른 점이 있나요?

 

D 씨> 다른 일본 사람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사는 동네에는 특별한 건 없어요. 단지 국적이 다를 뿐이죠.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G 씨> 저 같은 경우는 소속된 노인회가 두 개 있는데 조선인 노인회와 일본인 노인회예요.

 

D 씨> 서로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준다는 동등한 입장에 설 필요가 있어요.

 

영두> 진짜 일본인과 재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혼네와 다테마에의 차이는 있습니까?

 

D 씨> 혼네는 그 사람이 되어 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차별 의식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같은 연립주택 같은 곳에서 여러 사람이 생활했지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생활했지만 요즘은 같은 맨션에 사는 사람 사이에도 그런 교류가 없어졌어요. 옛날이 사람 간의 교류가 더 많아서 좋았어요.

 

영두> 후쿠오카를 더 잘 알기 위한, 실제 생활상을 알 기회가 되었어요. 제가 여러분의 지난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돌아가는 건 죄송하니까 한국 음악과 함께 전통춤을 보여 드릴까 해요. 청춘가라는 민요에 맞춰 춤을 추겠습니다.



일  시: 2012년 5월 9일(수)
장  소: 하코자키궁・하코자키 어항, 아시안 하이웨이 식전, 겐카이지마


 이날은 먼저 하코자키궁과 근처에 있는 하코자키 어항에 들렀습니다. 하카타만에서 신사의 본전까지 길게 이어진 참배로가 아름다운 하코자키궁. 해상교통과 외국 방위의 신이 모셔진 본전을 지나 참배길 끝으로 연결된 해안은 하카타 명물 ‘야마카사’ 의식인 ‘오시오이 도리’가 행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베이사이드로 이동. 후쿠오카가 동경 니혼바시에서 터키를 관통하는 ‘아시안 하이웨이’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후쿠오카-부산 간이 유일한 해상로로서 하이웨이의 일부로 인정된 것을 축하하는 식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후쿠오카 도시고속도로에 ‘AH’(아시안 하이웨이 약자)라고 적힌 간판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길이 바다를 건너 터키까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낭만적인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항구에서 배를 타고 싶다”는 영두 씨의 부탁으로 시영 운항선을 타고 켄카이지마로 향했습니다. 하카타항에서 약 30분. 이 섬은 2005년에 발생한 세이호오키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본 지역이지만, 지금은 집들도 새로 지어져 마을 정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한 시간이면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지만 천천히 주위 풍경을 음미하면서 걸어서인지 두 시간 만에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해안에는 한글이 적힌 페트병이나 깡통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일  시:2012년 5월 8일(화)

장  소: 하카타항・후쿠오카시 박물관


프로젝트의 첫걸음은 항구를 보고 싶다는 영두 씨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딘가에서 와서 어디론가 떠나는 장소인 항구. “항구나 바다는 일본, 후쿠오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것이 영두 씨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습니다.

 하카타항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쉼 없이 오가고 있습니다. 사실 하카타항은 외국인 여행객 수가 일본 최대인 국제터미널. 연간 약 87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중에80퍼센트가 한국인 여행객.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고속선으로 3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항구의 컨테이너 구역에서는 컨테이너들이 계속해서 퍼즐처럼 쌓이거나 날라집니다. 영두 씨는 그런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후쿠오카시 박물관도 둘러보고 고대로부터 이어온 한일 교류에 대해 학예사의 설명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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